[12/11] 흉내내는 신(계시록 13: 11-18)
- 오천호 목사

- Dec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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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어제 본문에 나타난
첫 번째 짐승과 다른..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한다.(11절)
이 짐승은
'어린양'의 모양을 가졌다(11절)
이 두번째 짐승은
이적을 행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우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경배하게 했다(13-15절)
이 짐승은
초대교회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황제 숭배교'와
당시에
성도들을 혼란하게 했던
이단들과 물질주의를
의미할 것이다.
아픈 사실은
그 모양이
어린양을 흉내낸다는 것이다.
마치
진정한 하나님처럼..
평화와 사랑과
정의를 말하고
보여 주려고 하지만..
사실 그 결과는
사람들을
더 타락하게 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정한
하나님을 흉내내는 것은
그 짐승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666'이란 표도 마찬가지이다.(16절)
'666'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의견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로마 황제 중
네로나 다른 황제들의
이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사람의 불완전한 숫자인..
'6'이 세 개가 모인
상징적인 숫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모두 가능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 볼 때
짐승이 이러한 666이란 표를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었던 모습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도장)을 치신 것과
비교할 수 있다(7장 3절)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인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와 함께 하심을 상징한다.
마치 그것을 흉내내듯이
짐승 역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마와 손에 표를 주어서
그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어떤 다른 이익을 약속하며 또 실재로 그러한 이익을 주고 있는 것이다(17절)
그러므로
이 짐승은
하나님의 능력과 모습을
흉내내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일시적이지만
이익과 성공을
보장해주기도 한다.
오늘 나의 삶속에
아니 이 땅에
이 짐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물론 겉으로 드러난
이단과 세속적인 물질주의도
이 짐승을 따르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픈 이야기 이지만
어린양을 흉내낸다는 것은
교회안에 깊게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이름을 빼앗는 모든 것들이 될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라는 형식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이 아니라
내 물질과 지혜를 더 의지하는 모든 모습일 것이다.
신앙과 교회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성을 쌓는 데에만
마음이 기울어져 있고
내 교회와 사역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이 두 번째 짐승의
모습일 것이다.
그 짐승은 당장은
더 많은 것을 가지게 하고
더 많은 승리를
보장해주며
겉으로 승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린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이름과
용인 사단을
경배하는 것이기에
결국은
죽어가는 교회이며
죽어있는 신앙이며
잠자고 있는 사역자와 성도들이다.
하나님과 비슷한 모양을 흉내내는 신을 따라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와
사역자들!!
그러한 아픈 모습이
나의 삶과 사역과
내가 섬기는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이마에 주신 표는
그 짐승이 주는 666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흉내는 흉내일 뿐이다.
그곳에는 진정한 자유와 능력도 없으며
영광과 승리도 없다.
결국 짐승은 실패하며..
하나님은 그의 인치심으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결국은 승리케 하신다.
오늘 말씀은
그리고 계시록은
'흉내내는 신'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가짜이며
진정한 어린양께서
백성들과 교회를
붙잡고 계시며
승리케 하신다는 것을
약속하며 격려하는 것이
목적이다.
오늘도
나에게 백성의 도장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어린양을 찬양하자.
오늘도
부족한 나를 이끄시며
주님과 함께
진정한 자유와 감사와
평강을 이루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소망하자.
그 어린양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혼란하고
미혹하게 하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담대함과 소망으로
걸어가는
오늘과 나의 삶이 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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